경구피임약 장기 복용 환자에서 발병한 아급성연합변성
Subacute Combined Degeneration in a Patient with Long-Term Oral Contraceptive 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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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수의 아급성연합변성(subacute combined degeneration of spinal cord, SCD)은 척수의 뒤기둥과 가쪽기둥에 발생하는 변성으로 주로 비타민 B12결핍에 의해 발생한다. 아급성연합변성은 특징적인 임상양상, 척수자기공명영상(MRI)와 혈중 비타민B12 농도의 감소로 진단한다[1]. 비타민B12 결핍은 주로 악성빈혈, 위 절제, 영양실조 등 다양한 원인에 의해서 발생하지만, 저자들은 경구피임약 장기 복용 환자에서 혈중 비타민B12 농도가 감소하여 아급성연합변성이 발생한 증례를 경험하였기에 영상 소견과 함께 보고한다.
증 례
22세 여자가 악화되는 보행 장애로 내원하였다. 1개월 전부터 양쪽 발바닥의 감각 저하와 양쪽 하지 위약감이 발생하였고 2주 전부터 양쪽 손발이 저렸으며 1주 전부터는 균형을 잡지 못해 독립 보행이 어려웠다. 위 절제술을 포함한 수술력은 없었으며, 알코올 중독이 아니었고 육류를 포함한 식단을 거르지 않고 유지하였다. 지난 2년간 경구피임약(estradiol 0.02 mg, gestodene 0.075 mg)을 매일 복용하였고 이외 장기 복용한 약은 없었다.
신경학적 진찰에서 근력저하 없이 사지 저림을 호소하였고 진동 및 위치 감각이 소실되어 있었다. 심부건반사는 정상이고 바빈스키 징후는 관찰되지 않았다. 균형 장애가 심하여 혼자서 서 있을 수 없었고 Romberg검사에서 눈을 감자마자 넘어졌다.
척수 MRI에서 제3경추부터 제5경추에 이르는, 조영증강되지 않는 긴 T2고신호강도의 병터가 척수 뒤기둥에서 관찰되어 아급성연합변성의 소견을 보였다(Fig.). 신경전도검사에서 양쪽 비골신경과 후경골신경에서 복합근육활동전위 및 전도속도 감소가 관찰되었으며 정중신경 및 후경골신경 유발전위검사상 양쪽에서 중추성 전도장애가 관찰되었다. 혈중 비타민B12 농도는 142 pg/mL (정상치 172-1104 pg/mL)로 감소, 호모시스테인 농도는 65.0 μmol/L로 증가(정상치 6.3-16.7 μmol/L), 엽산 농도 정상(10.1 ng/mL)이었다. 혈색소 12.9 g/dL로 정상 범위였으나 평균적혈구용적(MCV)이 101.0 fL (참고치 80-98 fL), 평균적혈구혈색소량(MCH)이 33.4 pg (참고치 27-33 pg)로 증가되었다. 말초혈액도말표본검사에서 거대적혈구가 관찰되었으나 적혈구부동증(anisocytosis)은 관찰되지 않았고 혈액검사를 종합할 때 거대적혈모구빈혈(megaloblastic anemia)과 유사한 소견을 보였다. 구리결핍척수병을 감별하기 위해 시행한 혈중 구리 농도는 156.2 mcg/dL (참고치 75.0-145.0 mcg/dL)였다. 최종적으로 비타민B12 결핍에 의한 SCD로 진단하였고 비타민B12 결핍의 원인을 찾기 위해 시행한 복부 컴퓨터단층촬영검사에서 장결핵, 장허혈, 소장의 염증 등의 이상 소견은 없었고 위축위염과 악성빈혈을 감별하기 위해 확인한 벽세포항체와 항내인자항체는 음성이었다. 위축위염을 영상으로 확인하기 위한 위내시경검사는 환자가 거부하여 진행하지 못하였다. 입원 첫날부터 복용하던 경구피임약을 복용 중단하였고, actinamide 1 mg을 입원 1일째, 7일째에 근육주사하였다. 입원 5일째 저린감 및 기립 시 불안정이 호전되었다. 7일째에 보행 장애가 호전되기 시작하여 10일째에 퇴원하였다. 퇴원 일주일 후 외래에서 추적한 혈중 비타민B12 농도는 1,191 pg/mL으로 호전되었다. Actinamide를 추가 1회 근육주사한 이후 mecobalamin 0.5 mg/day 경구 치료를 유지하고 있다. 퇴원 1개월 후에는 독립 보행이 가능하였다.
고 찰
비타민B12는 DNA합성에 중요한 인자로, 비타민B12 결핍은 거대적혈모구빈혈뿐 아니라, 척수병과 인지기능 저하 등의 여러 신경계증상을 유발하며, SCD의 경우 주로 척수뒤기둥의 침범으로 위치감각 저하로 인해 보행장애, 사지위약, 감각저하가 발생한다. 비타민B12 결핍은 채식주의자 혹은 영양 실조 시 동물성단백질의 섭취 부족으로 발생한다. 흡수장애는 악성빈혈, 위축위염, 위절제/우회수술, 제산제 과다 섭취 시 발생할 수 있다. 제산제 과다 섭취 시 위의 pH증가로 비타민B12가 단백질에서 분리되지 못하고 내인자의 결핍 시에는 회장 점막세포를 통한 흡수 과정에 장애가 발생한다[1]. 이외에도 이산화질소는 비타민B12를 비활성화시켜 비타민 B12 결핍과 유사한 증상을 유발한다.
비타민B12는 호모시스테인에서 메티오닌을 합성하는 과정에 관여하여 아데닌(adenine)과 구아닌(guanine)의 합성을 돕고 이를 통해 DNA, RNA합성이 이루어진다. 또한 비타민B12 부족 시 프로피온산 대사과정에서 비정상 지방산이 형성되어 수초합성에 사용되므로 수초의 안정성이 낮아지고 탈수초화가 발생하여 신경계 장애를 유발한다[2].
본 환자는 소화기계 질환의 병력이 없고, 말초신경계 장애 및 유전적 흡수장애의 가족력이 없는, 정상 발달, 정상 체중의 20대 여성으로 임상, 영상, 혈액검사 소견이 SCD에 합당하였고 복용하던 경구피임약의 중단 및 비타민B12 보충 치료를 통해 빠른 회복을 보였다. 검사결과와 병력 청취, 가족력 확인을 통해 악성빈혈, 식이장애, 유전학적 장애는 비타민B12 결핍의 원인에서 배제하였고, 환자가 복용한 약물과의 관련성에 대해 고려하였다. 비타민 B12의 흡수 저하를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metformin이나 양성자펌프억제제, H2차단제 등의 약물 복용력은 없었고 비타민 B12의 비활성화를 일으키는 일산화탄소 복용도 없었다. 환자는 지난 2년간 꾸준히 에스트라디올이 포함된 경구피임약을 복용하였으며, 이를 복용한 여성에서 혈중 비타민B12 농도가 유의하게 낮음[3-5]이 여러 연구에서 보고되어 있다. 또한 경구피임약을 복용한 여성에서 그렇지 않은 여성보다 혈중 엽산의 농도가 낮고, 경구피임약을 장기 복용할수록 더 감소하며, 복용 중단 3개월 후에 정상치로 회복됨이 알려져 있다[6].
경구피임약이 혈중 비타민B12의 농도를 낮추는 정확한 기전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경구피임약 복용군에서 비타민B12 결합능의 감소가 보고되어 있다. 임신 중인 여성에서는 여성호르몬의 증가로, 위산의 비타민B12의 분해를 보호하는 당단백질인 트랜스코발라민 I의 합성이 감소되어 혈중 비타민B12 농도가 감소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경구피임약에 포함된 여성호르몬이 경구피임약 복용 여성에서 혈중 비타민B12의 농도를 낮추는 것으로 생각된다[3]. 다만 복부 컴퓨터단층촬영에서는 이상 없었고 벽세포항체가 음성으로 위축위염의 가능성은 낮으나, 위내시경을 하지 않아 위축성 위염을 영상학적으로 배제하지 못한 점이 한계로 생각된다.
본 증례는 기존에 알려진 SCD의 원인질환인 악성빈혈이 아닌, 경구피임약에 의한 비타민B12 결핍으로 발병한 SCD에 대한 첫 증례보고이다. 경구피임약과 비타민B12의 관련성은 오랫동안 논의되어 왔으나, 경구피임약과 관련된 SCD에 대한 이전 보고는 경구피임약을 1개월간 복용한 환자에서 SCD가 발생하였으나 진단과정에서 상부위장관 유암종에 동반된 악성빈혈이 원인임이 밝혀진 증례 외에는 보고된 바 없다[7]. 비타민B12 결핍에 의한 신경계증상은 비타민B12 보충으로 회복될 수 있어 조기에 정확한 진단과 원인 감별이 필요하며, 임상적으로 가임기 여성에서 SCD가 발병한 경우 경구피임약 복용 여부 확인이 필요하다.